[신게문학] Knights of Night 01 [거짓말]
[트레인 시티]
에똑-에똑-
모바일에서 익살스런 에밀리톡 알림음이 들려왔다.
막 숙소 도착 후 방에서 누워 한가롭게 쉬고 있던 밤은 심드렁하게 모바일을 켜 에밀리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보고싶어. 하고 싶은 얘기가 잔뜩 있어. 만나서 얘기하자. 6시 카페에서.'-라헬.
한가로움은 깨졌다.
밤은 일단 시계를 봤다. 지금 시간은 약 3시 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일단 답장부터 해야하나. 뭐라고 하지. 수 년만에 하는 첫대화인데.
그는 이런 풋풋한 사춘기 소년 같은 생각이 먼저 드는 자신에 놀랐다.
그는 이전에 만나면 물어야 할 것들을 미리 생각해둔 적이 있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왜 쿤 팀을 배신했는지. 퍼그와는 무슨 관계인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제쳐두고 밤이 첫마디로 고른 것은 '어떻게 지냈어'였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섞이긴 했지만 분명히 그는 아직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라헬의 안부를 걱정하는 말을 보낸 것이다.
숫자 1은 지워졌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직접 만나는게 아니고서는 아무 얘기도 해줄생각이 없다는 의미다.
밤은 이제 다른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쿤은 라헬을 쫓고 있다. 그의 팀을 깨고 그의 동료를 죽인 그녀를. 밤은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헬과 만난다는 것을 다른 동료들이 알게 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카페에 마취총을 든 지배인을 배치해둘 것이 눈에 그려졌다.
가장 친한 친구지만 역시 그나 다른사람에게는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밤은 지금이 꽤나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라헬과, 오랜만에, 데이트'라는 생각은 묻어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일 먼저 일단 멋진 옷을 골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옷장에서 가장 맘에 드는 옷들을 꺼내 이것저것 입어보았다.
평소에는 과하게 많다고 생각했던 옷들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입을게 없다고 느꼈다.
그나마 가장 낫다고 생각되는 청색 와이셔츠와 흰색 반바지를 입기로 결정했다.
하진성에게 거추장스럽다고 돌려보낸 옷들이 새삼 아까웠다.
옷을 다 입고 보니 막상 라헬을 만난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 가면 라헬이 있을까. 혹시 누가 장난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다시 한 번 에밀리톡을 보내기로 했다.
'니가 진짜 라헬이라는 걸 확인시켜줘.'
잠시 후 온 답장에는 글자는 없고 활짝 웃는 라헬의 사진만 첨부되어 있었다.
틀림없는 라헬이다. 주근깨도 노란머리도 그대로였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전혀 얼굴에 헤아려지지 않은 미소에 웬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지만
계속 들여다 보니'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버렸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벌써 5시였다. 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아 맞다 일단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묻기로 했지.'
'아냐. 그 전에 날 왜 보자는 걸까.'
제일 중요한 물음이 가장 나중에 떠올랐다.
수 년만의 만남,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그녀는 아주 중요한 것을 물어올 것이 분명했고 그 나름의 대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미팅 처음하는 신입생 마냥 쭈뼛쭈뼛 대는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라헬에게 들은 바깥세상 얘기다.)
도대체 수년 간 뭐하다가 이제와서 날 찾는 것일까.
만약 그 때처럼 또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면 정말 이번엔 마음이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함정이라고 해도 '역시... 나갈 수 밖에 없어..'라고 이미 마음은 굳어졌다.
밤은 약속시간 보다 정확히 10분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라헬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못보던 갈색 후드 혹은 모포같은 거적대기를 입고 있었다.
밤은 '얼마만인데 저런 차림이라니 너무 하구만.'하고 긴장감 없는 푸념을 속으로 늘어놓았다.
"먼저 와 있었네."
"방금 왔어. 일단 앉아."
밤은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일단 안심해. 여긴 나 혼자 왔으니까."
그는 두리번거림을 멈추고 눈 앞에 앉은 라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렇게 간단히 다시 만날 줄이야...'
그녀의 얼굴이 뚜렷하게 시야에 잡히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라헬을 좇아 탑을 올랐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야 실감이 좀 나는 모양으로 눈시울이 약간 뜨거워졌다.
하지만 금방 이 이상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은 좋지않다고 생각하며 뇌속 파동을 잠재우고
급하게 아까 한참을 생각했던 첫마디를 입 밖에 냈다.
"어떻게 지냈어."
"그게 궁금해?"
라헬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풋'하고 웃었다.
밤의 질문은 너무나 싱겁게 묻혀버렸다.
"나 말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우리 둘이 행복했던 때로."
"너에게 한 잘못들은...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사정이 있었어. 전부 내가 설명해줄게."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자...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거야."
"별이든 하늘이든 전부 내버려두고 우리 둘이서말야."
밤은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이런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퍼그라던가, 슬레이어라던가, 쿤과 다른 친구들에 대한거라던가.
여러가지 라헬이 할 만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없던 얘기에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밤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곰곰히 라헬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돌아간다...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너무 많은 시간을 탑에서 보낸지라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았다.
밤은 머릿속으로 차례차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시를 얻고 다시 쿤들과 만났던 날, 탕수육팀을 처음 만났던 날, 동료들의 목숨을 걸고 혹독한 수련을 받던 날
라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날, 탑에 처음 왔던 날, 탑에 오기 전.
'탑에 오기 전... 탑에 오기 전!
탑에 오기 전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수 있다? 정말로?'
함께 두던 체스, 읽어주던 책, 자신을 가두던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과 함께 내려왔던 기억,
여태껏 잊어버리고 살아온 탑에 오기 전 자신의 전부였던 것들이 떠올랐다.
라헬만 있다면 행복했었던 그 때. 그 때로 돌아가다니!
그러나 기쁨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같이 떠올랐다.
'여기서 얻은 동료들... 그들은 내가 없으면 죽어. 무리야. 도망칠 수 없어.'
밤이 라헬에게 배신 당하고 여지껏 그를 지탱해 온 삶의 이유.
여기서 얻은 동료들. 그들의 목숨이 잠시나마의 희망을 금방 부정해버렸다.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하나 둘 씩 해나가면 돼. 우선 친구들과 작별하는 것부터."
"내가 도와줄게."
진지 빨고 쓴다.